느짓놀이

POST : 리뷰/감상

The Lost Archive

제작 : Ubisoft, 발매 : 2012년

Assassin's Creed : Revelations 의 외전격 DLC입니다.



 아름답고, 난해하고, 적막하며, 상징적이다.





▲ 이 스크린샷은 Steam에서 인용.


 스포일링 없습니다.



 3인칭 액션인 AC 본편과 달리 로스트 어카이브의 장르는 1인칭 액션 어드벤처. 플레이어는 AC의 주인공 '실험체 17호' 데스몬드 마일즈의 바로 이전에 앱스테르고에 억류되었던 '실험체 16호' 의 기억을 여행한다.

 플레이 방식은 AC:R 본편의 '데스몬드의 여정' 과 동일하다. 허공에 블록을 생성해 디딜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이동한다. 적은 없으나 블록을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흐름' 과 길을 막는 레이저, (오류를 표현한 듯한) 검은 장애물 등을 헤치고 데이터 조각, 편지 등을 모으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목표. 총 7개의 챕터(메모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메모리에 숨겨져 있는 수집요소인 '파편'을 전부 모아야 진엔딩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플레이타임은 진엔딩을 보기까지 3시간 정도. 숙련됐을 경우 순수 클리어 시간만 따지자면 1시간 이하인데, 중간에 막히면 플레이타임이 쭉쭉 늘어난다.


 짧게 말하자면, '아는 만큼 느끼는' 게임.


 로스트 어카이브는 1인칭으로 진행되는 게임인데도 감정적으로 스토리에 몰입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보여준다. BGM은 없고, 무심한 콘크리트 텍스쳐가 가득한 배경, 재생되는 보이스 파일들, 중간중간 얻을 수 있는 텍스트 등을 통해 실험체 16호의 일생의 이야기가 은은하게 진행된다. 자살에 이른 16호의 처절한 일생과 대조적으로 게임의 분위기는 대체로 적막하고 차갑다. 엠비언트 호러[각주:1]에서 호러를 빼거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포탈>에서 포탈건을 빼면 나올 법한 분위기.


 로스트 어카이브에서 플레이어의 존재는 모호하다. 사실상 주인공이 '없다' 고 보면 된다. (데스몬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시뮬레이션도 없고, 환경도 없어. 내 몸조차도 느낄 수가 없어! 그럼 난 여전히 나인 거야? 아니면 그냥 일종의 프로그램인 거야?") 스토리는 들려오는 보이스 파일들과 더불어 플레이어의 이동에 따른 '공간' 의 변화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로스트 어카이브의 공간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성으로 가득하다. 아니, 공간 자체가 3차원적인 형태를 갖춘 텍스트라고 보면 된다. 미장센이랄까?


 예로, 도입부 (맨 위 스크린샷) 는 16호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겠다는 게임의 목적을 보여주듯 16호의 장례식의 장면으로 시작되고, 관을 내리기 위해 파인 듯한 땅 속의 구멍으로 뛰어내리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추상적인 블록으로 가득한 게임에서 가장 사실적인 이 풍경은, 실제 세계에서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장례식 한켠의 의자 위에 놓인 신문을 들여다보면 작은 글씨로 '미국인 시체가 티베르 강에서 발견, 자살로 추정' 이라는 기사가 쓰여 있다. 즉 16호의 시체는 앱스테르고에 의해 강에 던져졌으며, 그의 장례식은 이렇게 아름답게 이루어졌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 이 장례식의 장면은 16호의 상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장면을 상상했을까? 해석은 플레이어의 몫이다. 로스트 어카이브의 공간은 이렇듯 상징적이며 은유적이다.

 '신뢰의 도약' '애니머스 룸' '복도' '극장' '혼입 효과' '죽음의 강' '낙원' 등등 공간으로 형상화되는 내러티브에 대해 하나하나 썰을 풀고 싶은데, 그러려면 감상 하나 쓰는 데 며칠은 걸릴 것 같다...


 자신이 보고 있는 공간의 의미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순간의 전율은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을 만큼 독특한 경험이지만, 특유의 간접적인 표현방식 탓에 웬만큼 주변에 집중하지 않는 이상 공간에서 내러티브를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은 난해한 액션으로 가득한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게임이 될 공산이 있다. 세련된 은유인가 은유의 탈을 쓴 불친절인가의 기로.


 난해함을 더하는 또 다른 요소는 게임 여기저기에 한둘씩 새겨진 암호들이다. 점자, 히브리어, 바이너리 코드, 그리스 문자, 애너그램 등으로 이루어진 메시지들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나, 그 의미를 알려면 플레이어가 직접 구글링을 하며 해석해야 하는(...) 극한의 불친절을 자랑한다. 뭐 AC 시리즈는 원래부터 이랬다. 브라더후드 퍼즐 풀 때의 분노가...


 물론, 이렇게 요소를 파고들지 않고 보이스파일+약간의 텍스트로 전달되는 내용만 본다면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머리를 써 가며 이해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AC 시리즈는 원래부터 이랬다22222.



 플레이 방식은 매우 직관적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순간적인 타이밍을 노려야 하는 액션성이 짙어 난이도는 솔직히 어렵다. 패턴을 외운다고 썩 쉬워지지도 않으며, 종종 불합리할 정도로 까다로운 부분도 있다. 그래도 컨트롤에 좀 적응이 되면 비벼볼 만해진다. 난 1인칭 게임을 지독하게도 못 하는 타입이라 한참 헤맸지만 적응이 되니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노멀엔딩을 보고 나서야 진엔딩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은 퍽 좋은 선택. 사실 나도 첫 플레이엔 내가 뭘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16호에 대한 애정으로 박치기했지...


 시각적인 요소는 주저 없이 별 다섯 개. 조형물들의 형태나 빛과 어둠의 대조가 정말 아름다우니 손이 자동으로 스크린샷을 찍고 있을 것이다.




 호불호가 갈리는 물건인 것은 확실하지만, 나는 이 DLC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일부이기 때문에 저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라는 맥락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게임 특유의 내러티브 방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각주:2]  난이도를 좀 더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스토리를 좀 더 심층적이고 다면적으로 들여다볼 여지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팬으로서 스토리에 집중할 의욕이 있고, 실험체 16호나 루시 스틸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적인 내러티브를 체험하고 싶다면, 꼭 직접 플레이해 볼 것.

 셋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는 항목이 있거나 1인칭 액션에 약하다면, 음... 유튜브에서 무삭제 공략 영상을 보자. 오래 안 걸린다.

 정말 독특한데 그 독특함 때문에 섬뻑 추천하기 힘든 기기묘묘한 물건. 어쨌든 나는 그 셀 수 없는 리스폰을 견뎌내고 진엔딩을 보았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저만 죽을 수 없으니 여러분도 하세요. 16호 불쌍해요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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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르 명칭이 이게 맞나? 잔혹성을 배제하고 순수히 분위기로 공포감을 조장하는 호러. [본문으로]
  2. AC:R 본편에 로스트 어카이브와 같은 플레이 방식을 지닌 <데스몬드의 여정> 이 있지만, 로스트 어카이브를 따로 평가하는 이유는 전자보다 공간을 이용한 내러티브가 더 잘 다듬어져 있어서. 데스몬드의 여정에서는 '강'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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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5.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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